浪漫 shoot for love

물망초 영창咏唱 A: 기억되고 싶은 소녀

누군가 그녀더러 까탈스럽기 짝이 없는 애라고 했다.
무의미한 상대의 무가치한 불명쯤이야 희게 쌓인 먼지를 불어버리듯 묵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건만 타인이 무심하게 두고 간 악의를, 쓴맛이 나는 무성의를 훌훌 털어버리기에 희령은 많이 서툴렀다. 기질이 예민한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한참 어리니 당연한 일인데 그 예사로운 인과를 모르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애의 가장 가까운 보호자였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제법 불행이다. 배희령의 유년은 사랑받기 위한 발버둥의 연속이었다. 보통 형제는 스스럼없기 마련이건만 불균하게 분배된 애정은 비수처럼 날카롭게 버려져 남매를 이은 선마저 잘라놓았다.
여자애는 철저하게 고독하였다.
결승선은 달음박질칠수록 멀어졌다. 희령은 영영 끝나지 않을 짝사랑에 지쳐 자신을 열 달 품어 낳은 여자에게 체념하였다. 내가 아무리 어여쁘게 굴어도, 흥청망청 말썽을 피워도 요하는 관심과 사랑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실상을 어린 딸은 물망초 꽃잎을 박박 뜯으면서 시인했다. 엉망으로 찢긴 꽃의 잔해를 안은 채 조금 울었고, 그 뒤로는 눈물을 아꼈다. 무던해진 것이 아니라 상처를 외면하는 데에 덤덤해진 것이다. 잊히지 않고 싶었던 소녀의 존재가 희푸른 물안개로 조금씩 지워졌다. 그렇게 아스라이 사라질 줄로만 알았는데......
책갈피에 곱게 끼워 말린 암정색 압화처럼 그녀는 스스로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배희령이 사진을 전공한 것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주 정교하고 명료한 방식으로 제 삶의 궤적을 남겼다. 온전하게 파란 기억이었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사랑을 바라지 않는다. 남과 나의 취약성을 분절하고 공허로 스스로를 제련한다. 다만 현상된 사진은 불명의 세계에 물리량을 가진 실체로 남아 배, 희, 링, 세 글자를 형이상학적으로 증명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그 암암한 찰나들의 집합 속에서, 농구공을 튕기며 눈에 파란 하늘을 담던 어릴 적의 남자애는 희령에게 전부는 아니더라도 작은 위안으로 남았었더란다.
배희령은 추억을 담은 백지로 종이비행기를 접었다. 그리고 찰칵, 매너리즘을 느낄 새도 없이 셔터를 눌렀다.







물망초 영창咏唱 B: 기억하고 싶은 소녀

뷰파인더에, 이어서 스냅숏에 그 변화를 켜켜이 담고 싶은 피사체가 뚜렷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슬럼프에 빠지기 쉬운 창작자인 사진작가에게 있어 축복과도 같았다. 뮤즈라거나 영감을 주는 모델이라느니 거창해 빠진 표현을 구태여 갖다 붙이지 않아도 박병찬은 희령이 사진을 계속 찍고 싶게 만드는 영속의 대상이었다.
존재만으로 영원을 꿈꾸게 하는 남자애가 농구화를 신고 날아올랐다. 코트 위, 40분, 그중에서도 무릎에 폭탄이 실린 그 선수에게 출전이 허락된 시간은 게임 당 단 12분. 종 치자마자 매점으로 달려가서 오늘은 레몬 녹차를 먹을지 뽕따를 먹을지 아니면 아예 인스턴트 햄버거로 배를 채울지 마음 놓고 고르기도 빠듯한 그 짧은 시간 동안 병잔은 기적과 같은 초와 분을 땀방울로 채웠다. 경기장의 뜨거운 조명 아래서 주한 가은 광원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박병찬이 반짝였다. 그는 선수들 사이를 질풍마냥 내달려 볼을 돌렸고 유성을 닮은 슛을 메다꽂았다. 림이 철썩였다. 아득한 사건의 지평선 저편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 환호 소리. 그 순간은 조형고의 유니폼에서 비어져 나온 빛으로 온통 새파랬다. 처음에는 분명 존재함에도 사라지고 지워지는 나를 참을 수 없어 구명줄처럼 붙잡고 시작한 사진이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나를 연민하는 대신 제힘으로 손 닿는 데까지 새기기를 바라서, 내가 좋아하는 꽃의 이름과 사랑하는 음악과 입 짧은 주제에 혀에 자주 올리는 음식 같은 것들, 사사로운 나의 시야가 포착하는 세상을 나의 대체로서 인화지에 박제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 작은 낙원을 살별처럼 가로지르며 네가 내게로 왔다. 나 대신 남을 기록하는 일이 기꺼웠던 것은 처음이었다. 칸딘스키의 추상화와 같이 무질서한 사랑에 빠짐으로써 배희령의 세계가 넓어졌다. 작품을 자아내는 눈과 손이 깊어졌다.


너의 청춘을 조각조각 나누어 해지지 않을 영원으로 담고 싶어. 잊지 마 병찬아 나는 너를 기억하고 있어.









© 2023 시안(@cyan_NCM) all rights reserved